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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제가 오늘에게 내일을 묻고 있다
이완 편집장  |  hanurilw@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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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호] 승인 2017.02.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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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4년 아카데미 여우주연상 수상자는 오드리 헵번이었다. 그녀가 출연한 <로마의 휴일>은 영화사에서 가장 아름다운 로맨스 영화로 꼽힌다. 그 이야기를 쓴 작가 돌턴 트럼보는 각본상 수상자였지만, 시상식에 참석할 수 없었다. 그가 ‘블랙리스트’에 올랐기 때문이다. <로마의 휴일>은 그가 일자리를 잃고 생계를 위해 가명으로 쓴 대본 중 하나였다. 당시 미국을 휩쓴 반공산주의 광풍(매카시즘)은 할리우드에도 몰아쳤고, 찰리 채플린, 월트 디즈니, 로널드 레이건 전 미국 대통령 등도 블랙리스트에 들어있었다.

당시 미국처럼 우리 사회에서도 블랙리스트 망령이 떠돌고 있다. 최근 1만 명에 가까운 문화 예술인들의 이름과 그들을 배척하는 구체적 증거가 공개되었다. 급기야 이를 주도한 전직 대통령 비서실장과 현직 문체부 장관이 구속되는 초유의 사태가 벌어졌다.
사상과 표현의 자유가 있는 민주주의 사회에서는 누구든지 문학과 예술을 비판할 수 있다. 하지만 정권이 편향된 잣대로 문학과 예술을 권력자의 입맛에 맞게 바꾸려고 하는 일은 그러한 자유와는 별개의 문제다. 정권이 국민의 이러한 기본권을 침해한다면 헌법의 민주적 기본질서를 훼손하는 중대한 범죄가 된다.

하지만 문명사에서 권력에 의해 이처럼 사상 및 표현의 자유가 침해당한 일은 늘 있었다. 진시황의 ‘분서갱유’와 가톨릭교회의 ‘금서목록’, 히틀러의 ‘분서사건’등과 같이 당시 거대 권력에 의해 저질러진 만행이 그러한 사례이다. 이러한 사건들이 역사에 큰 상처를 남겼지만, 문제는 사상과 표현의 자유를 짓밟는 권력의 횡포는 그 오욕의 역사를 되풀이한다는 데 있다.

19세기 조선에서는 김정호의 《대동여지도》가 국가의 기밀을 누설한다 하여 혼신을 다해 한 땀 한 땀 수록해 놓은 목판본을 불태운 적이 있으며, 일제 때는 민족의식 말살을 위해 신채호의 《을지문덕전》이 탄압을 받았다. 18세기 서양에서도 루소가 《에밀》에서 자유로운 인간을 위한 참된 교육을 이야기했지만, 당시 교황청은 이 작품이 종교와 봉건통치를 거부했다는 명목으로 금서로 지정하였다.

그런데 지금은 조선시대나 일제강점기가 아니고, 더구나 교회가 무소불위의 힘을 휘두르던 문명 암흑기도 아니다. 더구나 ‘문화융성’의 기치를 내걸고 출범한 정권이 이러한 만행을 저질렀다는 것에 그 문제의 심각성이 있다. 군사독재 때나 존재하던 블랙리스트의 망령을 불러낸 현 정권은 우리의 역사를 30년이나 되돌려 놓았다.

블랙리스트는 정권의 취향에 맞지 않는 사람들에게 ‘좌파’라는 누명을 씌워 차별하기 위해 공권력을 조직적으로 동원한 일이다. 이러한 좌·우파의 개념은 프랑스 대혁명 때 생겨났다. 당시 혁명에 온건주의를 표방했던 지롱드당이 의회의 오른편(우파)에, 급진주의를 주장했던 자코뱅당이 왼편(좌파)에 자리했던 게 그 출발이었다. 언뜻 생각하면 이러한 좌·우파의 개념이 진보와 보수라는 실체적 의미를 지닌듯하지만, 실상 진보와 보수는 상대적인 개념이다. 만약 좌파가 제거되고 우파만 남는다고 해도, 정치의 속성상 기존 우파는 또다시 좌·우파로 갈릴 것이다. 그래서 리영희는 《새는 좌우의 날개로 난다》에서 어느 사회나 좌·우파는 존재하고, 또 존재할 가치가 있다고 했다.

어느 시대를 막론하고 국민의 사상과 표현의 자유를 억압한 정권은 존속하기 어렵다는 것이 역사의 교훈이었다. 블랙리스트 망령에 맞닥뜨린 우리에게 어제의 역사가 내일의 안위를 묻고 있다. 오늘을 사는 우리가 무어라고 대답해야 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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