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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시스 잠, 릴케, 백석 그리고 동주12. 중국 연길 용정의 윤동주 묘지
이희인 여행가/카피라이터  |  bookpluslife@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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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호] 승인 2017.02.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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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눈 덮인 산을 뒤져 간신히 찾아낸 시인 윤동주의 묘지. 오랜 세월 잊힌 적이 있던 무덤에 누군가 바치고 간 꽃이 아직 싱싱함을 간직한 채 놓여 있었다.

요녕성, 흑룡강성, 길림성 등을 아우르는 중국 동북 3성은 고대사의 얽힌 문제들로 인해 총성 없는 역사 전쟁이 벌어지고 있는 곳일 뿐더러, 독립 운동의 발자취가 남아 있는 현장인데 내겐 이곳이 자꾸만 위대한 시인들의 땅으로 생각되었다. 시인 윤동주가 탄생한 곳, 시인 이전에 열혈 독립 운동가였던 육사의 체취를 느낄 수 있는 곳, 시인 백석이 일제의 탄압이 심해지던 1930년대 말 “만주라는 넓은 벌판에 가 시 백 편을 가지고 오리라”며 찾아와 해방 직후까지 살았던 곳이 여기다.

연변 조선족 자치주의 수도 연길에서 하루를 묵고 이튿날 용정과 명동촌에서 시인 윤동주의 자취를 더듬던 참이었다. 너무나도 잘 안다고 생각했던 시 「별 헤는 밤」을 찬찬히 읽다가 뭔가에 머리를 한 대 얻어맞은 느낌이었다. 인용한 부분이 그 부분이다. 곧바로 백석의 시 「흰 바람벽이 있어」도 찾아보고 그 창작 연대도 확인해 보았다.

하늘이 이 세상을 내일 적에 그가 가장 귀해하고 사랑하는 것들은 모두 가난하고 외롭고 높고 쓸쓸하니 그리고 언제나 넘치는 사랑과 슬픔 속에 살도록 만드신 것이다. 초생달과 바구지꽃과 짝새와 당나귀가 그러하듯이 그리고 ‘프랑시쓰 쨈’과 ‘도연명’과 ‘라이넬 마리아 릴케’가 그러하듯이.
- 백석 「흰 바람벽이 있어」 (1941.4. <문장> 26호)에서

생각이 많아졌다. 두 시에 공통적으로 등장하는 프랑시스 잠과 릴케라는 시인들의 이름도 그러하거니와 대상과 사물들을 읊조리는 방식, 시 전반에 흐르는 정서까지도 너무나 흡사했다. 백석의 시가 동주의 시보다 몇 개월 앞서 발표된 것을 보면, 그렇다면 동주가 백석의 시를 표절한 것일까?

   
▲ 윤동주 생가 터 마당에 놓인 석비마다 시인이 남긴 시들이 새겨져 있다. 증언을 통해 복원된 생가와 교회 등의 건물이 인근에 함께 자리하고 있다.

명동촌의 복원된 윤동주 생가와 교회, 마을을 둘러보다가 시인의 묘지가 있다는 근처의 눈 덮인 산을 찾아갔다. 이렇다 할 안내판이 없던 야산의 꽤 너른 공동묘지에서 발목까지 푹푹 빠지는 겨울 산행을 감행하며 시인의 묘지를 찾는 일은 몹시 더디고 힘들었다. 두어 시간 만에 어렵게 찾은 시인의 무덤은 단출했다. 시인의 묘 옆에는 그의 사촌이자 평생 동지로, 동주와 생몰연대(1917~1945)까지 같은 ‘청년 문사’ 송몽규가 잠들어 있었다.

용정에서 학업을 마친 동주는 평양의 숭실중학과 연희전문에 이어 도쿄와 교토의 대학에서 학업을 이어갔다. 일제 말 일군의 유학생들과 함께 독립 운동 혐의로 투옥되고 불의의 생체 실험에 희생되어 1945년 2월 16일 후쿠오카 형무소에서 시인은 불귀의 객이 되고 만다. 그의 부친이 화장된 시신을 수습해 와 이곳 공동묘지에 안장한 뒤 시인의 묘지는 사람들 기억 속에서 잊혀왔다. 분단으로 남한 사람들은 1992년 한중수교 전까지 연변을 찾을 수 없었고, 문화혁명으로 인해 시인의 이름은 중국에서도 한동안 금기시되었던 것이다. 연변으로 유학하게 된 일본인 오무라 마스오 교수에게 시인의 동생 윤일주 교수가 형의 묘지를 찾아달라고 부탁하여 갖은 곡절 끝에 오래 잊혔던 묘지를 찾아낸 것이 1985년 5월의 일이다. 여전히 찾는 이가 많지 않은 묘지인데 묘 앞에는 누군가 바친 꽃이 한 다발 놓여 있었다.

   
▲ 윤동주를 비롯하여 많은 독립 열사를 배출한 용정의 옛 대성학교(현 용정중학교) 건물에는 용정의 역사와 함께 그들을 기리는 박물관이 마련돼 있다.
   
▲ 두만강을 따라 흘러 도착한 국경마을 도문. 출입이 제한된 도문대교 앞에 국경의 경계임을 알리는 표지석 너머로 멀리 눈 덮인 북한 땅이 눈에 들어왔다.

인터넷을 뒤져 동주의 「별 헤는 밤」과 백석의 「흰 바람벽이 있어」의 유사성에 관해 찾아보았는데 더러 언급된 포스트들이 있지만 명쾌하게 알려주는 글은 찾지 못했다. 다만 「별 헤는 밤」이 실린 시집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가 손으로 3부만이 필사되어 지인과 나눠가진 것이 기적적으로 소멸되지 않고 전해진 사정을 헤아려보면 그 시에 어떤 불순한 의도가 있다고 말하긴 힘들다. 자신의 시가 후대에 이토록 널리 애송되리라고는 꿈에도 생각 못했을 것인바, 그의 시 한 편 한 편이 성공과 명성을 위해 표절을 일삼지는 않았을 터다. 그가 평소에 시인 백석을 존경했던 점이나 당시 많은 시인들이 프랑시스 잠과 릴케를 동경한 사실로 보면 순수한 오마주이자 창작일 거라 추측된다. 탄생 1백 주년을 맞은 올해, 한 번쯤 시인의 묘지를 다시 찾고 싶다.

연변과 흑룡강성을 떠돌다 옛 만주국의 수도였던 창춘(長春)에 도착했다. 중국과 아시아를 점령하려는 야욕 속에 청나라의 마지막 황제 부이를 꼭두각시로 내세워 일제가 수립한 만주 괴뢰국의 수도가 창춘, 당시 지명으로 신경(新京)이었다. 1930년대 이 도시로 많은 조선인들이 저마다의 꿈을 갖고 모여들었다. 그들 가운데 ‘가난하고 외롭고 높고 쓸쓸’했던 시인 백석도 끼어 있었으리라. 백석의 삶을 추적한 시인 안도현의 《백석 평전》을 보아도 만주에서의 백석의 삶은 알려진 것이 많지 않다.

그 기간에 쓴 것으로 추정되는 시들을 통해 만주의 삶을 가늠해볼 뿐이다. 백석이 살았다는 동삼마로 길모퉁이에 서서 ‘시 백 편을’ 쓰기 위해 골똘해 있는 시인의 모습을 생각했다. 모든 사물과 풍경들을 찬찬히 들여다보는 시인의 눈이 그려진다. 프랑시스 잠과 라이너 마리아 릴케와 동주가 그랬을 것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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